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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의 흔적 - 태국 아유타야 포로 수용소 2

by JONYTHAI JONY JUNG 2016. 6. 9.


[일본군의 깐차나부리 포로(연합군) 수용소]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폭격과 함께 이뤄졌다는 일본군의 대동아 공영 (남방 폭격작전) 승리로 인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주둔 연합군은 일본군에 의해 맥없이 무너졌고, 이로 인해 패한 후 포로로 잡힌 연합군의 수는 일본군도 놀랄 정도로 엄청났다. 해전 승리 이후, 1942년 3월 버마로 진출하는 일본.

하지만, 일본군은 1942년, 6월 5일 연합군과의 미드웨이 해전에 패한 후, 해상 수송이 어려워 지자, 진출해 있던 버마 육로를 통한 수송수단 건설에 나서게 된다.


1942년 9월 부터 시작된, 군수송물자 수송철도 건설은, 태국 깐차나부리에서 버마 만달레이를 기착점으로 잇는 군수물자 수송 철도, 이른 바 죽음의 철도 건설에 나서게 된다.


이때 칸차나부리에 있었던 일본군이 운영하는, 연합군포로 수용소는 , 연합군 포로 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조선인 간수들 그리고 일본군이 있었고, 인근 칸차나부리 강가로 가는 골목인, 팍프랙거리(현재의 콰이강의 다리 마을)에는 껑수피니 위안소가 있었는데,일본군들이 강가로 목욕을 하러 가는 길에 위치 해 있으며, 껑수피니 위완소에는 한국, 대만, 중국등에서 온 위안부 처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칸차나부리 철로의 기착점인, 버마의 만달레이 에서는 말레가라는 위안소 등 9곳의 위안소가 운영되었었는데, 일본군 뿐만 아니라, 군수물자 관련 상사의 일본 직원들 또한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위안소가 대형으로 운영되며 조선 처녀들이 철로를 통해 공급됐다고 한다.


버마 전선 참전 군인이었던 [요시오카 노리키]의 KBS 1TV 2015년 8월 9일 방송 분 인터뷰 내용에 따르자면, 이곳에서는 조선과 대만 등 중국 여성 위안부 뿐 아니라, 버마와 태국 카렌족등도 동원 되었었다고 증언한다.



종전 당시 연합군이 기록한 자료에 의하면, 태국의 조선인 위안부는 1500여명이나 된다고 기술되어 있다.


어떻게 태국의 조선인 위안부 수가 1,500여명이나 짐작되어 지는가? 하지만 지금은 감쪽 같이 존재가 사라져 버린 그녀들은 도데체 어디로 간 것인가?


1942년 6월 전남 보성군 경백면에서 농사를 짓던 이학래 씨(당시 17세)는 당시 일본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조선 징병제 실시가 시작된 터라. 일본군 보다는 태국등의 연합군 포로 감시원을 자원하게 된다.


 이는 엄밀히 말해 , [월 50엔씩 월급을 벌 수 있다]며 반강제적인 면장의 권유 술책에 이끌려 감시원으로 나섰다고 전한다. 


태평양전쟁에서 동남아 지역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패한 연합군의 포로가 30만 명이나 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국과 대만에서 연합군 관리가 가능한 영어가 되는 포로 감시원을 급히 모집한 것이다.

이들의 대표적인 활동이 바로 깐차나 부리에서 버마 간의 군수송 물자를 실어 나를 계획이었던 일본군 군수물자 전송열차 선로 공사였다. 


공사 도중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 중 엄청난 수가 죽어 나갔기 때문에 후에 이 철도를 죽음의 철도라 부르게 된다.


태국∼버마(미얀마) 간 철도 건설 현장에 배치되어 선로 공사에 동원되는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지시하는 역할이 주된 업무였다고 한다.


2015년 04월02일 동아일보 박형준 일본 특파원 취재 보도에 따르면, 이학래씨는 당시를“명령에 따라 포로들을 중노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날씨에 음식도 부실했다. 전염병도 돌았다. 수 많은 포로가 현장에서 죽었다”


라고 회상했다. 당시 죽음의 건설 철도 현장에서는 2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를 회상하는 연합군 포로의 태국인 아내나 , 당시 주민들이 증언에 따르면, 밥과 설탕 혹은 소금 조금, 그리고 오이 몇조각을 식량으로 공급한 해, 고된 노무에 동원시켜 기아와 말라리아 등으로 많은 연합군포로가 죽어 나갈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칸차나부리 연합군 공동묘지에는 당시 사망한 6,982명의 연합군 병사의 묘가 있으며 , 인근에는 당시 칸차나부리 포로 수용소를 재현해 놓은 제스 전쟁기념 박물관이 있다. JEATH는 일본(Jepan), 영국(England),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태국(Thailand), 네덜란드(Holland)의 앞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당시 포로들의 부대인 연합군의 승리로 종전 되고 난 후 이들은 포로 감시원에서 상황이 역전되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고 , 감시원으로 활동하던 조선인들에게 학대당하던 연합군 포로들의 증언에 따라 빼도 박도 못하고 전쟁 주모자, 혹은 전범 신세가 되어 대부분 사형에 처해진다.


일본군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채 칸차나부리 철도 공사에 강제 동원되었던 연합군 포로들은 실제 일본군 조직이나 상부 조직 보다는 매일 매일 자신들을 학대하며 지시를 내리던 조선인 감시원들에 대해 오히려 더 자세하고 또렷이 기억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씨등은 전범용의자로 지목되어 연합군의 일본군 포로 수용소 감옥으로 끌려갔다. 한국인 중 B·C급 전범으로 선고받은 이는 모두 148명. 이 중 129명이 포로 감시원이었다. 23명은 사형을, 나머지 125명은 징역형을 받았다. 


이씨는 사형은 면했지만, 태국과 일본 등의 감옥에서 11년을 살다 감형받아 1956년 10월에 석방되었으나, 친일 반역자로 내 몰릴까 두려워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인 일본군 감시원 뿐 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던 조선, 대만 등의 아녀자들 또한 , 패전 후 도피하는 일본군들에 의해 집단 도살 되거나, 살아 남았어도 연합군 일본군포로 수용소에 갇히는 불행을 겪게 되는데, 현재 태국에는 당시 위안부 아녀자들이 살해된 지역에 귀신이 자주 출몰하는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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